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코 브라헤 (문단 편집) == 천문학자로서 == '인간 천문대'로 불릴 정도로 엄청나게 시력이 뛰어난 걸로 유명하다. 망원경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 시력을 통해 그는 어마어마한 양의 정밀 관측을 할 수 있었고 덕분에 천문학자로 대성할 수 있었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408px-Mauerquadrant.jpg]] 이런 것을 만들어놓고 의자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관찰하는 것이 그 시대의 관찰 방법으로, 보는 사람과 각도를 불러주는 사람, 계산하는 [[인간 컴퓨터]][* 티코 브라헤가 고용한 유명한 컴퓨터로는 [[요하네스 케플러]]가 있다. 케플러는 어린시절 천연두의 영향으로 시력이 좋지 않은 대신 수학적 능력이 뛰어나 우수한 인간 컴퓨터였는데, 후술하듯 티코 브라헤 사후 관측자료를 넘겨받아 계산을 통해서 여러 천문학적 업적을 남긴다.]가 각각 따로 존재했다. 이 방법으로 그는 새로운 별이 생겨난 것을 발견해 천구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였다. 신성 사건은 당시 교회의 '중층적인 천구 중 가장 바깥의 천구는 영원불멸하다'는 천구 이론에 대하여 '영원불멸의 천구'에서 생사가 존재하는 별을 반례로 제시한 것이었다.[* 1572년의 초신성 폭발인 SN 1572를 관측한 것이었다. 티코의 저서 외에 이 초신성이 기록된 문헌으로는 [[이이]]가 저술한 『석담일기』, [[조선]]의 『[[선조수정실록]]』, [[명나라]]의 『[[만력제|신종현황제]]실록』등이 있다. 현대의 연구를 통해 동반 거성에 의해 일어난 Ia형 초신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.] 그는 그 '별'을 계속 관측한 끝에 이를 토대로 『신성에 관하여』라는 책을 냈으며, 덕분에 학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. 이후 정밀한 조사 결과 [[초신성]]임이 밝혀졌지만, 당시엔 초신성의 개념조차 없었으니 당연한 오류다. 한편 그 또한 [[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]]의 [[지동설]]에 대해 알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했다. 천동설을 따를 경우 [[금성]]의 위상 변화와 [[연주시차]], 즉 금성이 새벽과 저녁에만 보이면서 보름달에 가까운 위상이 보이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, 이 문제는 천동설과 지동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열쇠였다. 티코 브라헤는 자신의 그 미친듯이 뛰어난 눈을 가지고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참담하게 실패했다. 그럴 만도 했던 것이, 연주시차는 단위가 [[도]]와 분을 넘어서 초 단위로도 '''소수점'''까지 떨어지는 매우 작은 차이라 아무리 눈이 좋다 한들 맨눈으로 관측하는 건 불가능하다. 그럼에도 그는 [[주전원]] 같은 문제를 해결하며 교회의 심기를 거스르지도 않는 천동설과 지동설의 중간 단계인 자신만의 체계를 만들어낸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576px-Tychonian_system.svg.png]] 달과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돌고 다른 모든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이 바로 그 체계다. 교과서에서는 천동설과 지동설을 모두 받아들였다고 하여 절충설이라고 나와있다. 당시의 천동설과 지동설의 문제점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었으나, [[요하네스 케플러]]식 지동설에 의해서 이 체계는 깨지고 만다. 이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[[덴마크 국왕]] [[프레데리크 2세]]로부터 [[코펜하겐]] 앞 외레순 해협의 벤(Ven) 섬과 그 곳의 주민들을 하사받았고, 그 곳을 "우라니보르크(Uraniborg,[* 모국인 [[덴마크어]]로는 Uranienborg라고 쓴다.] '빛나는 성'이라는 뜻)"라고 이름붙인 뒤 자신의 천문학 기지로 삼았다. 이 외딴 섬에서 거대한 상한의(象限儀)[* 90도의 눈금이 새겨져 있는, 부채 모양의 천체 고도 측정기. 18세기까지 쓴 것으로, 한 변은 수직이 되도록 고정하고, 부채꼴의 중심점과 천체를 연결하는 선을 눈금으로 읽어 천체의 높이를 잰다. '사분의(四分儀)'라고도 한다.]만을 사용하여, 20년 간 천체 연구를 하였고, 웅장하고도 포괄적인 항성목록을 작성하였다. 여기에는 변하는 행성의 위치를 그 배후의 항성과 대비시켜 나타내 주는 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. 여담이지만 그의 서재에는 유명한 천문학자들을 그린 벽화가 있었는데, [[자뻑|마지막 인물은 바로 자신이었다.]] 사실 당대의 입장에서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를 감안하더라도 틀린 말까지는 아니었으나, 그 바로 다음 세대에 천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이자 [[과학 혁명]]의 선구자, [[천체역학]]의 창시자인 [[요하네스 케플러]]가 등장하는 바람에 묻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